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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음식 탐구

길 위의 로마 – 군인의 전투식량과 이동식 부엌 이야기

by 선식담 2025. 4. 22.

제국을 움직인 발걸음, 그 뒤에 숨겨진 식사 전략

“군대는 배로 움직인다.”
이 말은 고대 로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전성기 로마의 군단병은 하루 평균 30km 이상을 행군했고, 최전방에서 전투를 준비하며 생존과 기력을 유지하는 음식은 전술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 군단의 식사는 단순한 생존 도구가 아니라, 군기의 연장선이자 제국의 확장을 위한 정교한 영양 전략이었습니다.
오늘은 고대 로마 군단의 전투식량을 현대 영양학과 약선요리, 그리고 인문학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로마 군인의 주식 –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전투식량

1. 빵 (Panis Quadratus)

고대 로마 군인은 **전립분(거친 통밀가루)**로 만든 딱딱한 빵을 기본 식량으로 들고 다녔습니다. ‘전투빵’이라 불리며, 물이나 와인에 적셔 먹기도 했습니다.
식사 준비가 어렵거나 야영 중일 때도 이 빵 한 덩이는 칼로리와 포만감을 동시에 제공했습니다.

현대 영양학 해석: 전립밀은 저GI 식품으로 혈당을 천천히 올리고, 식이섬유가 풍부해 장 건강과 체중 조절에 도움을 줍니다.


2. 건조 렌틸콩, 병아리콩, 누에콩

육류 공급이 일정치 않았기에, 콩류는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습니다. 말린 콩을 휴대했다가 물에 불려 수프나 죽으로 끓여 먹었습니다.

약선 관점: 콩은 체력 회복과 면역 강화에 좋고, 간을 보하며 기운을 북돋는 약재 역할도 합니다.

 


3. 말린 고기 & 소금 절임 고기 (Carne Condita)

신선한 고기를 유지하기 어려운 원정 환경에서 훈제 혹은 소금에 절인 고기는 귀중한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일부 장교나 보조병은 치즈나 올리브도 함께 섭취했습니다.

현대 영양학 해석: 육류는 고단백 식품이지만, 보존 방식에 따라 나트륨 섭취에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활동량이 많은 군인에겐 필수 영양소였습니다.


4. 식초 물 (Posca)

식초와 물을 섞은 ‘포스카(Posca)’는 로마 군단의 전통 음료였습니다. 단맛은 없지만 갈증 해소와 항균 효과, 소화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현대 해석: 약산성 식초 물은 피로 회복, 식욕 촉진에 도움을 주며, 자연 발효로 만든 건강 음료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군단의 이동식 부엌 – Field Kitchen

고대 로마의 야영지는 단순히 전투를 위한 휴식처가 아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병사들은 하나둘 모닥불 주위로 모였습니다. 그들 손에는 밀가루, 렌틸콩, 말린 고기, 올리브유, 채소 등이 들려 있었죠. 불 위에 걸린 커다란 솥 안에는 죽이나 스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군단의 ‘이동식 부엌’이었습니다.

이 야전 요리는 단지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장시간 행군으로 지친 몸에 필요한 열량과 영양을 채워줄 뿐 아니라,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이 전우들과의 유대감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매개가 되었죠.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함께하는 그 시간은 병사들에게 큰 심리적 안정이자 위로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식사 준비는 로마 군단의 훈련 중 하나였습니다. 정해진 규율에 따라 식재료를 배분받고, 병사들이 직접 요리를 담당하는 과정은 질서와 협동심을 기르는 교육이기도 했죠. 말하자면, 이들의 식사는 전투력 유지와 공동체 정신 함양을 동시에 이루는 ‘맛있는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인문학적 시선 – 절제, 자립, 그리고 연대

로마 군인의 식사는 지금 기준에서 보면 참으로 소박했습니다. 기름진 고기나 향신료 가득한 요리도 없었지만, 이 단조로운 식사야말로 로마 군단을 지탱한 중요한 힘이었습니다.
그들의 식사는 언제나 ‘질보다는 양’, ‘맛보다는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즉, 전투와 행군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열량과 기본적인 영양만 확보되면 되는 식단이었죠. 하지만 이 간소한 한 끼 속에는 단순한 생존 이상의 철학이 숨어 있었습니다.

첫째, 절제의 철학입니다. 로마인들은 지나친 탐식을 경계했고,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절도 있는 식사를 중시했습니다. 이는 몸을 가볍게 유지하고, 정신을 흐리지 않도록 돕는 생활 방식이었죠. 전투 전이나 후에 과식을 피하는 것은 군의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습니다.

둘째, 자립의 가치입니다. 로마 군인은 단순히 싸우는 병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텐트를 세우고, 자신의 식사를 준비하고, 전우들과 식재료를 나누며 요리하는 데에도 능숙했습니다. 각자에게 할당된 식재료를 규율에 따라 배분하고, 공동으로 조리하는 과정 자체가 훈련이자 자율성을 키우는 교육이었습니다.
이는 전투 외 시간에도 병사들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자율적인 전사’로 성장하게 했습니다.

셋째, 전우애의 미학입니다. 전투가 없는 날 저녁이면 병사들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 함께 솥을 걸고, 죽이나 스튜를 끓이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식사 시간은 단순한 배식이 아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을 나누는 시간. 뜨거운 국 한 그릇이 몸을 데울 뿐 아니라, 마음도 함께 데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식문화는 로마 군단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병사 간의 신뢰와 연대감을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로마 군인의 식사는 단순한 군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식사는 질서와 규율의 상징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먹는 방식 자체가 로마 군단의 철학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문화였던 셈이죠.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로마 군인의 식단은 매우 제한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향신료도, 풍미도 부족하고, 선택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기본에 충실하고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하는 식사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이 절제된 식사야말로 로마라는 제국을 만든 병사들의 일상이고, 그들의 정신이었습니다.


약선요리로의 응용 – 로마의 전투식에서 얻는 지혜

오늘날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도 건강을 챙기기 위해 선택하는 ‘한 그릇 건강식’은, 어쩌면 로마 군단이 실천했던 식사의 연장선일지도 모릅니다.
고대의 전투식량은 약선요리 철학, 즉 ‘몸에 맞는 음식으로 기운을 돌보는 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렌틸콩 수프 + 보리밥

단백질과 복합 탄수화물을 함께 섭취해 에너지 지속력을 높이는 조합입니다. 기력 회복과 위장 강화에 좋아 피로한 날 추천합니다.

 

전립밀 납작빵 + 올리브오일 & 식초

빵을 구워 보관하고, 식사 직전 식초에 살짝 적셔 먹는 방식은 소화를 돕고 열을 내려주는 약선 방식입니다.


결론 – 로마 군단이 남긴 식사의 유산

로마 제국의 팽창을 가능하게 한 무기 중 하나는, 기본에 충실한 전투식량이었습니다.
이들의 음식은 단지 칼로리를 공급하는 것을 넘어, 몸의 리듬과 전장의 환경을 고려한 ‘전략적 식사’였죠.

오늘날의 우리는 편의성과 풍요 속에서 건강을 잃기 쉽습니다. 고대 로마 군인의 식사에서 우리는 절제, 자립, 회복의 지혜를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